풍성한 추락을 담다

1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가을은 풍성한 수확을 의미하기도 하고, 겨울을 앞두고 한없이 낮아지는 순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막연히 ‘여름이 갔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성큼 한발을 내민 겨울을 맞이할 때가 오고 있다. 어느 때보다 쌀쌀하고, 어느 때 보다 앙상해질 시간을 앞두고 단풍나무는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한껏 그 색을 뽐내고, 지난 푸르름을 뒤로 한다. 올해가 가기 전 어디라도 잠깐 다녀오고 싶었다. 무작정 걷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었다. 무겁게 챙겨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갖고 있는 카메라 중 가장 가벼운 녀석을 백팩에 넣었다. 캐논 미러리스 M6 하나, CANON EF 24-70mm 렌즈 하나. 더 가지고 갈 것도 없었다.

글·사진 | 유진천 기자

 

 

사람은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는데 나무들은 가지를 덮고 있는 옷의 색을 바꾸고 그 옷을 벗음으로 겨울을 준비한다. 이렇게 눈에 띄는 변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느낌이 물씬하다. 겨울은 사람에게도 나무에게도 춥고 메마른 계절이다. 그리고, 이 겨울이 가고 다가올 따뜻한 봄을 그리게 한다.

 

캐논 카메라는 따뜻한 색을 특히 잘 표현한다. 불에 타는듯한 붉은 색의 단풍이 도드라져 보인다. 가벼운 M6로 단풍을 풍성하게 담을 수 있었다.
캐논 카메라는 따뜻한 색을 특히 잘 표현한다. 불에 타는듯한 붉은 색의 단풍이 도드라져 보인다. 가벼운 M6로 단풍을 풍성하게 담을 수 있었다.

 

그냥 무작정 남한산성을 찾았다. 딱히 이곳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곳이 아닐 이유도 없었다. 오래전 누군가가 이곳의 단풍이 예쁘단 얘길 전해줬었다. 단지 나는 그 사람이 보고 싶은 마음을 이곳에 오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올해가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지금, 나의 2017년을 돌아보면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 겨울을 살아남기 위해 붙은 잎사귀를 떨어내듯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의 수많은 고민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민에 잠겨 걸으면서 보인 남한산성의 든든한 모습과 풍성한 낙엽이 어우러진 장면은 알 수 없는 위로가 됐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견뎌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을은 막연히 쓸쓸하고, 막연히 외로워지는 계절이다.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웅성웅성한 공간 속에 있을 때는 그 느낌이 조금 덜 느껴지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가을을 만나 확장되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연말이라고 사람들과 약속을 마구잡이로 잡는 것도 이런 마음이 한몫 하지 않았을까. 한 명이라도 더 만나고, 한 명이라도 더 마음에 새기려고 말이다. 옷도 마찬가지다. 하나라도 덜 걸치기 위해 노력했던 여름과 달리 겨울에는 조금이라도 더 뭔가가 있었으면 하는, 그런 욕심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셔츠에 니트를 걸치고, 외투를 걸치고 머플러까지 걸쳐도 뭔가 허전하게만 느껴진다.

 

가을은 신비한 계절이다. 떨어진 나뭇잎조차 다시보게 만든다. 물듬의 아름다움이다.
가을은 신비한 계절이다. 떨어진 나뭇잎조차 다시보게 만든다. 물듬의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을 더해 살아남으려 하고, 나무는 가지고 있는 것을 덜어 살아남으려 한다. 겨울을 온전히 나기 위해 나무는 자신의 풍성한 잎을 떨어뜨린다.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들을 털어내고 오롯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복잡한 생각이 들수록 다른 것보다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는 것. 나무에게서 배워가는 삶의 지혜다.

가볍게 산책을 이어나갔다. 손에 든 것은 없었다. 그냥 걸었다. 이번 촬영에서는 걸음이 멈춰진 장소가 나오면 한 장만 찍는 방식을 택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다시 오지 않을 장면과 마주하는 것이 사진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붉은 색과 노란색,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초록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서 ‘자연이 만들어낸 그라데이션이란 이런 것이구나’ 한 번 더 감탄한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 속에서 홀로 서서 변화를 지켜본다. 잠깐 떠나온 곳, 잠깐 떠나온 시간에서 나는 풍성한 추락을 만났다. 내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견디기 위한 움츠림이다. 붉은색과 노란색의 가을 지나 흰색의 겨울,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린다.

 

초록색과 붉은색, 풍성함과 앙상함이 한 화면에 있다. 놓칠 수 없는 순간에 캐논 M6와 함께 했다.
초록색과 붉은색, 풍성함과 앙상함이 한 화면에 있다. 놓칠 수 없는 순간에 캐논 M6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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