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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국가지정문화재 순례 - 방초정의 연못방초정 연못 '최씨 담'과 정려각(旌閭閣), 돌비, 열행비(烈行碑)
방초정과 연못 '최씨 담'과 2개의 섬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방초정(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47호) 앞에 위치한 연못인 '최씨 담'은 이정복의 처 화순 최씨 부인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열일곱에 방초와 혼인한 최씨는 신행길에 임진왜란(1592~1598)을 맞았는데 시가에서 죽겠다며 원터마을로 오다가 왜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자 못에 투신했다는 열행(烈行)이 <경상도 읍지>에 전해진다. 신행길이라면 혼인 후,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길이다. 신행길이라 했으니 방초 자신도 혼례 때밖에 보지 못한 신부를 주검으로 맞이했을 것이다.   

뒷날, 방초정 앞에 방지(方池)를 조성하면서 최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최씨 담'이란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우리나라의 연못에서 섬은 대개 삼신사상(三神思想)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이 있거나 또는 천원지방(天圓池方) 사상을 나타내는 한 개의 섬을 조성해 두는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씨담에 두 개의 섬을 조성한 것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은 최씨와 석이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었다고 한다.

또는 연못을 하늘로 보고 해와 달을 상징 하는것으로 하여 2개의 섬을 두었다고도 한다.

최씨 정려각(旌閭閣)
최씨 정려비(旌閭碑)
인조가 직접 쓴 정려문

최씨의 열행은 1632년 인조가 직접 쓴 정려문을 내려 기렸고 1752년에는 방초정 옆에 정려비(旌閭碑)를 세웠다. 그는 숙부인으로 추증됐고, 1764년 정문(旌門)을 비각 안에 함께 세웠다. 대개 정려는 비석이나 정문의 형태로 세워지는데, 최씨 부인에게는 두 가지가 단칸 정려각(旌閭閣) 안에 함께 모셔져 있다.

투박한 돌비의 주인공, 최씨의 여종 석이(石伊)- '忠奴石伊之碑(충노석이지비)'

최씨 정려각 앞의, 투박한 돌비의 주인공, 최씨의 여종 석이(石伊)다. 최씨 부인이 못에 몸을 던지자, 함께 뛰어든 노비 석이도 상전을 뒤따랐다. '忠奴石伊之碑(충노석이지비)' 여섯 자가 서툴게 새겨진 이 비석은 연안 이씨 후손들이 여종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만들었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얕게 새겨진 글씨는 희미해졌다. 정려각 안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된 숙부인의 크고 높은 정려비에 감히 견줄 수 없다. 후손들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노비들이나 마을의 상민들이 석이의 죽음을 기리려는 것을 용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박하게나마 그의 충절을 기려 비석은 지었으나 감히 노비의 비석을 절부(節婦)의 정려 앞에 세울 수 없었다. 결국, 이 비석은 '최씨 담'에 던져졌다. 빗돌이나마 상전인 최씨 부인의 연못에서 상전과 함께하라는 뜻이었을까.

이 비석이 발견된 것은 1975년 최씨담 준설공사 중에서다. 물속에 묻혀 있던 돌비는 '좋은 시대'를 만났다. 살아생전에 최하층 신분으로 물건처럼 사고 팔렸던 노비 신분을 면치 못했던 석이는 수백 년간 물에 잠겼다가 만민평등의 시대에 못 밖으로 나온 것이다.

풍기 진씨의 열행비(烈行碑)

정려각 옆에 비각이 하나 더 나란히 서 있다. 1937년에 세운 풍기 진씨의 열행비(烈行碑)다. 풍기 진씨(1912~1935)는 이정복의 후손 이기영의 처다. 열여덟에 이기영과 혼인했는데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친정에서 복막염으로 숨지자, 치료를 제대로 못 해준 자기 탓으로 여겼다. 

진씨는 남편의 시신 옆에 가 반듯이 누워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 방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전국 각 유림에서 애도문과 제문, 만사 등을 보내왔으며 이태 후에 정려를 세워 후세인의 본보기로 하였다는 게 <영남삼강록>과 <충의효열지> 열부 편에 전하는 내용이다. 

방초정과 최씨 정려각, 돌비, 진씨 열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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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환 기자  bori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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