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산수유, 매화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

구례군 산동면 – 산수유가 만든 황색 왕국(Yellow Kingdom)

     나는 10여 년 전에 양씨 성을 가진 이 마을 출신 후배의 초대로 처음 방문한 것을 계기로 매년 산수유 구경을 나서곤 한다. 보통 산수유마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산수유를 키우는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부근의 여러 마을을 아울러서 부르는 말이며, 요즘은 이천의 도립리, 양평의 내리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산수유 마을로 명성을 얻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산수유 꽃이라는 것이 조금 남다른 부분이 있다. 꽃망울의 크기가 다소 작아서 철쭉이나 진달래처럼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리 예쁘지는 않아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뭉쳐있는 꽃들이 모여서 풍기는 은은한 멋스러움이 일품인 꽃인 것이다. 멀리서 보아야 이쁜 ‘100미터 미인’이라고나 할까? 

 

 

 

반곡마을의 국민 포인트

      상위마을 부근에서 시작해서 산수유 왕국을 감싸 흐르다가 섬진강의 품에 안기는 서시천은 구례 분지의 젖줄이라고 불린다. 이 물줄기는 반곡마을 부근에 이르면 병풍처럼 두른 산수유와 멋진 바위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지리산 자락을 아울러서 산수유 군락지 최고 포인트라고 칭송받는 사진 명소를 만들어 낸다. 일명 ‘산수유 국민 포인트’ 

 

 

인산인해(人山人海)는 어디로?

      작년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다. 좀 늦게 출발하기도 했지만,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몰렸던지 축제장으로 가는 길은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2Km 전방부터 명절의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는 막힌 길에 갇혀서 거의 두 시간을 허비하고서 겨우 주차에 성공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올해는 여느 시골 마을처럼 한산한 모습에 적막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코로나19의 위세가 온 나라를 얼어붙게 하고 있다. 물론 사진기를 들고 여기저기 셔터를 누르는 나로서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상춘의 재미 중의 하나는 정겹고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광양시 다압면 – 섬진강 매화마을

      산수유에 노랗게 물든 가슴을 애마에 싣고, 내친김에 섬진강이 휘돌아가는 광양의 매화마을까지 꽃구경할 요량으로 먼 길을 달려온 아내와 나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매화 축제가 취소되었으니 방문을 자제해달라'는 현수막이었다. 구례 산동에서도 축제의 취소를 아쉬워하던 현지인들의 하소연을 듣고 왔기에, 이곳 주민들의 심경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취소된 축제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매실청 같은 특산물 몇 가지를 큰 파라솔 아래에 간이 좌판을 펼치고 손님들 눈치를 살피시는 어르신들의 눈빛이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를 닮은 듯이 아래로  자꾸만 내려가고 있었다. "손님을 부르시는 목소리도 여지없이 데크레센도네?"  라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좀 잡았더니, 작곡을 전공한 음악가인 아내가 씩 웃는다. 매화마을 골목을 벗어나려 왼편으로 몸을 돌리니 흐드러진 매화나무 꽃그늘 아래서 작은 호미를 들고 축축한 땅을 열심히 뒤지시는 엄니 한 분이 계셨다. 한참을 살폈더니 역시나 봄나물을 낚고(?) 계신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생각에 조용히 담고는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으신다. 이렇게 이 땅의 봄은, 자식 손주 생각하며 나물 찾으시는 굽은 손의 엄니들에게 가장 먼저 포획되고 있었다.

 

 

 

이슬비가 더해준 멋스러움 – 새옹지마?

      차에서 내리면서 조금씩 흩뿌리고 있는 이슬비를 원망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얄미운 존재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렌즈와 바디(body) 커버로 아이 감싸듯이 싸매고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매화 동산의 풍경은 맑은 날보다도 훨씬 찐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뭐든지 100퍼센트 나쁜 것도 100퍼센트 좋은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흑과 백 사이에는 항상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내리는 이슬비만큼 카메라에 담기는 사진의 색감은 짙어지고 있었다.

 

 

 

큰 개불알풀도 선홍빛 동백도

      매화의 자태와 향기에 취해서 카메라 가득 백매, 홍매를 담고 모퉁이를 도는데, 잠깐 비친 햇살에 유난히 특이한 색을 자랑하며 “나 좀 봐주세요” 하는 눈짓으로 연보랏빛 꽃들이 나를 부른다. 아내가 꽃 이름을 묻는데, 선뜻 답하기가 좀 그래서 머뭇거리다 또 한 번의 재촉에 ‘개불알’이라 답하자, 농담으로 받아들인 아내가 눈을 부라린다. “맞아, 저 꽃 이름이 ‘큰 개불알’이야.” 큰 개불알풀이라는 이름의 유래까지 설명하면서 농담이 아님을 설명해야 하는 아주 재미있는, 그리고 오해를 자주 부르는 특이한 이름의 들꽃이지만 이 녀석도 복수초나 별꽃, 꽃다지, 그리고 달맞이꽃처럼 이 땅의 봄을 주름잡는 진정한 터줏대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개불알은 꽃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아니고 꽃이 진 후 씨앗이 맺힌 모양이 개불알을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요즘은 어감이 너무 좋지 않아서 ‘봄까치꽃’이라는 멋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다행이다. 꽃잎을 그늘에 말려서 은은한 향까지 선사하는 꽃차로도 사랑받는 이 녀석이 품위(?)에 걸맞은 이름을 얻게 되어서 말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매화에 포위된 채로 선홍빛 망울을 터뜨린 동백 한 그루도 아우성이다. 나도 봄꽃이라고.

 

 

 

100만 명승의 유명세는 어디로?

       산수유마을에서의 한산함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곳에 왔는데, 여기도 상황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주차장은 빈 곳이 더 많았고, 작년에 왔을 때의 북적거림이 주었던 흥겨움은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너나없이 쓰고 있는 마스크는 꽃놀이 온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10만 그루가 넘는 매화나무가 만들어 내는 장관 덕분에 1년에 평균으로 백만 명 정도가 방문하여 매화나라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돌아간다는 명승지의 포스는 코로나 때문에 숨어버렸고, 한산함 속에서 예년의 10분의 1쯤 되는 듯한 용감한(?) 사람들만이 마스크로 무장하고 조심스레 봄을 맞고 있었다.

 

 

 

코로나 직격탄에 봄꽃 축제 실종 - 여전히 아름다운 우리 강산

     유행병의 위력을 실감하며 아쉬움을 표시하는 현지 상인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안타까움을 공유하였다. 특히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들른 벚굴(왕굴) 식당의 주인은 매출은 거의 의미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심지어는 수확한 벚굴을 강바닥에 그냥 두는 일도 있다고 수심 어린 낯빛으로 하소연을 이어갔다.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내외와 또 다른 한 부부를 빼고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화려한 식탁 장식으로 단장한 테이블들은 말끔히 비어 있었다. 하도 맛나게 흡입하는 아내를 위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벚굴 몇 개를 더 양보하고 나는 재첩 비빔밥으로 갈아탔다. 꽃구경에 눈이 배부르고, 늘어가는 셔터 숫자에 가슴이 배부르고, 벚굴과 재첩 비빔밥으로 배 속까지 채우고는 다시 섬진강 줄기를 따라서 올라가는 길을 따라서 봄빛은 점점 더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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