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방향으로 향하는 23번 국도.

달리는 차창밖으로 낮선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나바위성당....!

우리나라 천주교초기에 세워진 성당으로 1987년에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천주교초기에 세워진 성당으로 1987년에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나바위?

나바위라는 지명의 호기심도 있었거니와 운전의 피곤함도 떨쳐버리겸 인근 자그마한 가게앞에 차를 세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한웅쿰의 쪽파를 다듬던 주인 아주머니가 형식적인 손님맞이 눈인사를 보내왔고,

가게모퉁이에서 배를 깔고 졸고 있던 강아지는 낯선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힐끗 쳐다본 후 고개를 돌려 다시 눈을 감는다. 가게안 음료수 냉장고에서 탄산음료 한개를 꺼내들어 값을 지불하며 나바위성당에 대해 넌지시 물어봤다.

주인아주머니는 낯선이들에게 받는 익숙한 질문인 듯, 가게밖 나바위성당쪽 먼산을 잠시 쳐다보고 입을 떼기 시작한다.

한옥의 양식과 서약식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한옥의 양식과 서약식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원래 나바위라고 허는것은 넓적헌 바위가 많다고혀서 너른바위라는 뜻인 나암[羅岩]이라고 혔는디 순수헌 우리말로는 나바위라고 허지요. 성당자리는 원래 동학 농민운동허다가 망헌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897년도에 이동네 주임으로 부임헌 베르모넬(Vermorel, 張若瑟, 1860~1937, 요셉)신부가 돈 천냥에 구입혀 뜯어 고쳐갖꼬 성당으로 사용허기 시작혀서 요만큼됐드만요.”

1916년에 증축하면서 목조종탑대신 고딕식 벽돌로 쌓았고 그후에 두번의 개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16년에 증축하면서 목조종탑대신 고딕식 벽돌로 쌓았고 그후에 두번의 개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사투리섞인 말주변이 좋았고,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이의 표정이 맘에 들었는지 다듬던 쪽파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자세를 고친후 하던말을 이어갔다.

“여기가 망성면(望城面) 화산리(華山里)인디, 화산(華山)이라는 지명은 조선후기에 학자도 허면서 문신(文臣)이기도 헌 송시열(宋時烈)이 지어줬데요.

그려서 옛날에는 화산성당이라고도 불렀다는디 전주옆에 있는 완주군 화산면허고 여기허고 동네 이름이 같어서 나바위성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혔데요.”

본당의 뒷모습. 팔각지붕과 종탑의 조화가 탄성을 자아낸다.
본당의 뒷모습. 팔각지붕과 종탑의 조화가 탄성을 자아낸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오토바이소리가 가게앞에 멈추고 그동네에서 들일을 하다 온듯한 차림세의 중년남자가 들어와 담배 한갑을 주문한다.

진열대 많은 담배중에 요구한 담배를 익숙하게 찾아 건네며

“은희 아버지는 나바위성당이라고 고쳐부르던게 언제적이었는지 아시죠?”

주인아주머니의 물음에 은희아버지라는 남자는 담배값을 뜯으며 나와 잠깐 눈을 마주친 뒤 말을 했다.

“1989년도잉게 벌써 30년이 넘었지잉. 손님도 나바위성당엘 오셨는가 봐요?”

다시한번 나의 눈을 마주친뒤 말을 이어갔다.

본당 뒷편 화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앞에 젊은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나온다.상해에서 나바위에 처음 상륙할때 나이가 20대이었기에 앳된모습으로 제작된 모양이다.
본당 뒷편 화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앞에 젊은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나온다.상해에서 나바위에 처음 상륙할때 나이가 20대이었기에 앳된모습으로 제작된 모양이다.

 

본당을 바라보는 김대건신부의 성상이 조화를 이룬다.
본당을 바라보는 김대건신부의 성상이 조화를 이룬다.

 

“나바위는 원래가 선착장이었는디.... 근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누구인지 아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모르기도 했지만 대답을 할 틈도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김대건신부라고는 들어봤지요잉?

1845년에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랑 조선인 천주교신자 열한명허고 라파엘호라는 배를 타고 한양에 포교를 헐라고 오다가 폭풍우를 만나서 제주도에 표류혔는디, 배를 고쳐갖꼬 오던중에 사람들 눈을피혀서 오게된 곳이 이곳 나암포잖여요. 그때 김대건 신부일행이 우리나라땅을 밟은 것을 기념헐라고 베르모렐신부가 1897년에 본당을 설립허고 1906년에 성당 건물을 신축하였소.”

치유의 경당. 치유의 경당은 1956년에 건축되었다.당시에는 진료소와 성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어 육체적 치료와 마음의 치유와 위안을 주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치유의 경당. 치유의 경당은 1956년에 건축되었다.당시에는 진료소와 성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어 육체적 치료와 마음의 치유와 위안을 주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 성당에 특별헌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 풍속에 따라서 남녀의 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각기 다르게 만들었다는디 이것을 아직까지도 지켜지고 있다고 허드만요.

그나저나 나는 벌려논 일이 급혀서.......”

말끝을 흐리며 중년남자는 하던일이 바빴는지 황급히 자리를떠났고,

주인아주머니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자기가 못다했던 이야기 다시 이어갔다.

성모상이 나바위 성당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있는 이곳은 전라북도의 3대 명당자리라고 한다.
성모상이 나바위 성당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있는 이곳은 전라북도의 3대 명당자리라고 한다.

 

“그런디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상에 대한 전설이 있는디....”

주인아주머니는 아주 중요한 얘깃를 하듯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모후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초대 부임 신부인 베르모넬 신부님이 본당을 짓고나서 화산에다가 성당을 지을라고 거기를 가보니깐, 조그만헌 암자에 스님한분이 살고계셨다는 거여요. 그려서 베르모넬 신부님이 스님헌테 가서 암자를 양보 혀주십사허고 부탁드렸는디 스님이 거절혔다드만요.

그러다가 몇달이 지나서 보니깐 스님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와서 화산을 떠난다고 혔다드만요.

그렇게도 완강허게 버티던 스님이었는디 무슨일인가 허고 알아보니깐,

신부님이 스님을 찾아간 다음날부터 밤이면 밤마다 꿈속에 성모님이 나타나서 이자리는 내자리다 떠나거라 떠나거라 그러더라는 거여요.

이일을 기념허는 의미에서 1960년대에 본당인 성심회에서 힘을 모아 이자리에 성모님을 모시기 시작혔다고 허드만요.”

망금정.1915년 베르모렐 신부는 주교의 피정(신부님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과 성찰기도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장소)을 돕기위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망금정.1915년 베르모렐 신부는 주교의 피정(신부님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곳에서 묵상과 성찰기도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장소)을 돕기위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망금정과 마주한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순교기념비는 김대건 신부가 상해를 떠나 귀국길에 오를때 42일간 타고온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망금정과 마주한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순교기념비는 김대건 신부가 상해를 떠나 귀국길에 오를때 42일간 타고온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자기가 격은일인 것처럼 사실감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더니,

주인아주머니는 겸언쩍었는지 탁자위 한쪽으로 밀어놓았던 쪽파를 다시 자기앞으로 당겨 다듬기 시작하며.

“신도들이야 가끔 와보것지만 딴사람들은 성당구경하러 일부로도 오고 그러는디 여기까지 온김에 성당한번 둘러보구가셔요.”

십자가의 길망금정주변에 있는 조각상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고난과 죽음을 표현한14개의 사건을 조각해 놓았다고한다. 십자가의 길은 화산정상의 망금정까지 이어진다.
십자가의 길망금정주변에 있는 조각상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고난과 죽음을 표현한14개의 사건을 조각해 놓았다고한다. 십자가의 길은 화산정상의 망금정까지 이어진다.

 

시간을 보니 목적지에서의 약속과는 충분한 여유가 있어 아주머니말대로 여기까지 온김에 나바위성당을 들러보기로 마음먹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주인아주머니는 또다시 형식적인 눈인사로 배웅을 하였고, 그때까지도 미동없이 엎드려 졸고있던 강아지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낯선이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본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계속 잠을 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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