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원(興園)

 경기도 남양주시를 지나다보면 길가에 '흥선대원군묘'라는 팻말이 보여 평소 궁금하던 차에 이번 코로나 사태기간에 방문하였다.

한적한 묘소 진입 안내소
한적한 묘소 진입 안내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는 1978년 10월10일 경기도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으며 흥원(興園)이라고 한다. 1898년(광무 2)에 죽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로 처음에는 고양군 공덕리에 있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되었고 1966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는 안내문의 설명이다. 창현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산 중턱에 2단으로 나뉘어 있으며 봉분을 따라 기와를 얹은 나즈막한 돌담이 둘러져 있다.

國太公園所 대원군묘소라는 뜻. 즉 이하응의 높임말
國太公園所 대원군묘소라는 뜻. 즉 이하응의 높임말

 조선 말기에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고종 황제의 생부로서 자는 시백(時佰), 호는 석파(石坡), 시호는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이하응은 개화기 격변의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로 철종이 1863년에 승하하자 후사가 없었으므로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국내외가 복잡다단하던 때 과감한 서정개혁에 착수하였다.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를 일소하였으며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의 폐를 없애는 데 노력하였다. 대전회통 등 법전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비변사를 폐지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다.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고 1866년에 프랑스군(병인양요)이, 1871년에 미군(신미양요)이 각각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시켰고, 일본의 국교 교섭 요구도 거부하는 강경한 대외정책을 폈다.

남양주시를 내려다 보는 묘소 전경
남양주시를 내려다 보는 묘소 전경

 그는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와의 알력으로 1873년에 은퇴하였다. 그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톈진에 4년간 갇혀 있기도 하였다.

위의 설명에서 처럼 3번씩이나 옮겨진 그의 묘소는 뜻밖에도 파괴의 흔적이 많았다

우선 입구의 신도비(神道碑)부터 총탄자국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파손된 모습이 있었고 묘소에 늘어선 여러가지 석상들도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파손된 흔적이 역역했다.

묘소앞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
묘소앞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

그렇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느낀점은 비록 그의 명성에 비길 원성 만큼이나 파손의 흔적이 있지만 묵묵히 그의 무덤을 수호하고 있는 많은 석상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마석(馬石)
마석(馬石)
양석(羊石)
양석(羊石)

 

 

신도비(神道碑) 아래 귀부(龜趺)
신도비(神道碑) 아래 귀부(龜趺)

근세 개화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흥선대원군의 못다이룬 꿈의 아쉬움일까? 다시 일어서려는 듯 귀부(龜趺)아래 발가락에 힘이 들어있다.

허술한 철문이 닫혀있던 입구의 개복숭아꽃이 그의 꿈을 대신하고 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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