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을 조명하다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년)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년)에 돌아가셨다.

선생은 성리학이 가장 크게 일어날 적에 이의 체계를 세우고 새로운 학설을 덧붙여 집대성했다.

일찍부터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확립시켜 끊임없이 수정 · 보완을 거듭했다. 이기론을 쉽게 설명하면, 인간은 본래 착한 바탕[理]이나, 태어나 살다 보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氣]는 것이다. 따라서 ‘이’(理, 四端)를 바탕으로 해 끊임없이 자기 수양이나 교육을 통해 '기'(氣, 七情)를 다스려 인간의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사물을 순리로 운영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를 주리론자(主理論者)라 단정한다.

 

'理'(인간의 타고난 본성) - 四端

 

1. 측은지심(惻隠之心) : 불쌍히 여기는 마음
2. 사양지심(辭讓之心) : 양보하는 마음
3. 수오지심(羞惡之心) : 부끄러워 하는 마음
4.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氣'(기질의 성) - 七情

 

1. 희(喜) : 즐거워함
2. 노(怒) : 노여워함
3. 애(哀) : 슬퍼함
4. 구(懼) : 두려워함
5. 애(愛) : 사랑함
6. 오(惡) : 미워함
7. 욕(欲) : 욕심을 부림

 

이황은 두 가지 일에 역점을 두었다. 하나는 교육운동이다. 그가 풍기군수로 있을 적에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국가공인 교육기관으로 만들어 학자들이 공부하게 했고,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있으면서 학문하는 분위기를 길렀으며,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당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도산서당과 서원의 전경
도산서당과 서원의 전경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그의 문하에서 유성룡, 김성일 같은 쟁쟁한 벼슬아치와 정구, 김우옹 같은 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학문 연구이다. 그는 성리학만이 아니라 치도(治道)의 요체, 자기 수양방법, 현실 개혁 등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는 향리에서 학문을 익히다가 20대 후반에 진사가 되고 30대 초반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순탄하게 관직의 길을 걸었으며, 마지막에 학자 문사의 최고 영예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마지막 벼슬인 대제학을 받은 그는 나이 일흔에 가까워 뜻을 학문에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러고는 거듭 출사(出仕)하라는 선조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성학십도(聖學十圖)》만을 바치고 다시 낙향하였고, 고향에 돌아온 지 3년이 못되어 조용히 인생을 마감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서원 내에 거주하신 완락제
퇴계 이황 선생의 서원 내에 거주하신 완락제

그가 죽은 지 4년 뒤 제자들은 도산서당 뒤편에 여러 건물을 짓고 도산서원을 이룩해 그를 기리는 위패를 모셨다(1574년). 그리고 이황이 쓰던 자리, 베개, 문방구, 투호 도구 등을 보관했는데 오늘날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산서원에서는 무수한 인재를 길러냈는데 19세기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때에도 철폐 대상이 되지 않았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1575년(선조8년) 도산서원 전교당 편액(현판)은 석봉 한로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시사단 : 정조 16년(1792년)에 정조 임금이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 총 응시자 수 7,228명, 임금이 직접 선발한 인원 11명
시사단 : 정조 16년(1792년)에 정조 임금이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 총 응시자 수 7,228명, 임금이 직접 선발한 인원 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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