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기를 닮은 필름
Kentmere 100 (켄트미어 100)

많은 사람이 필름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135판형에서는 더이상 필름 시스템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다. 필름의 물리적 특성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이미지는 여전히 디지털에서 구현하기 힘들다. 특히 흑백사진의 경우 계조와 입자감을 디지털에서 재현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 영국에서 날아온 개성 넘치는 흑백필름이 있다. DCM에서 켄트미어 100 흑백필름을 살펴봤다.

글ㆍ사진┃채동우 기자

최초 스캔 받은 파일을 라이트룸에서 후보정했다. 날아간 것 같았던 명부 상당부분이 어색하지 않게 살아났다.

특유의 부드러운 톤이 특징


필름사진 찍기 힘들어졌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필름의 종류도 줄은데다가 필름값도 천정부지로 뛰었기 때문. 수년전과 비교했을 때 배 이상 오른 필름 가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과거에 필름 소모량이 많으나 주머니가 가벼웠던 학생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롤 필름도 예전 그 가격이 아니다. 이렇듯 필름시장에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에 단비 같은 흑백필름이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켄트미어다. 타사 유명 흑백필름 대비 저렴한 가격에 비교적 고품질 결과물을 기대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필름곽에 프린트된 HARMAN technology Ltd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우선 ILFORD 필름을 생산하는 하만사에서 만든 필름인 만큼 대충 만든 저가 필름은 아니라는 것. 두 번째는 일포드 필름의 특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켄트미어는 코닥 흑백필름과 달리 콘트라스트가 강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고른 느낌의 결과물이 특징인 필름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느낌이라는 말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사진 위에 한 층의 대기가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을 말한다. 컬러사진이었다면 미색이 한층 끼어 있었을 사진을 만들어 준다. 마치 영국의 대기가 그러하듯 독특한 분위기로 덧입혀지는 것. 이는 사용자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다. 강렬하고 임펙트 있는 콘트라스트 강한 흑백사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필름일 수 있는 것.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단순히 사진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켄트미어는 집요하리만큼 명부의 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필름스캔 후 날아가다시피 한 명부의 디테일을 손쉽게 끌어올리도록 도와준다.

어차피 지금 시대에서 필름을 즐기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현상된 필름을 스캔 받아 디지털화 한 후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후보정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켄트미어 필름은 디지털 시대에 꽤 적합한 필름일 수 있다.

증감현상 시 눈에 띄게 강해지는 콘트라스트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흑백필름은 컬러필름과 달리 증감이나 감감 시 색이 틀어지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낮은 감도의 필름을 고감도로 설정해 촬영한 후 증감현상을 통해 적정노출의 결과물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그 반대로 감감현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증감현상을 하게 되면 콘트라스트가 강해지고 입자도 굵어진다.

켄트미어 100의 경우는 어떨까? 앞서 이야기한 원래 필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부드러움이 상당 부분 상쇄되고 강하고 선 굵은 느낌의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흔히 만날 수 있는 흑백필름의 콘트라스트로 재현되는 것. 워낙에 부드러운 톤의 필름이라 2스톱 정도 증감해도 명부가 눈에 띄게 날아가거나 과도하게 콘트라스트가 강해지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는다. 입자감도 과도하게 거칠어지지 않는다. 안심하고 증감현상을 해도 되는 것.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는 과감히 감도를 올려 촬영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예컨대 빛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굳이 감도 100을 고집하지 말고 400으로 설정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켄트미어 100을 단순히 부드러운 톤을 특징으로 한 중감도 필름으로 정의내리기 힘들어 진다. 2스톱 증감 촬영 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고감도 필름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디테일하다. 디지털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변환한 사진과 흑백필름을 현상해 스캔한 사진을 어렵지 않게 구분해낸다. 그리고 사진의 내용을 떠나 어떤 결과물이 더 깊이감 있는 표현을 하는지도 알아챈다.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눈은 아날로그이기 때문이 아닐까. 저렴한 필름카메라 한 대 구해서 가끔, 생각날 때 한 번씩 필름을 장전하고 셔터를 눌러보는 것도 좋겠다. 느긋하게, 혹은 조바심 내면서 기다린 후에 받아보는 결과물은 기대 이상일지 모른다.


카메라에서 필름 감도를 400으로 설정해 촬영한 후 2스톱 증감현상한 결과물. 원래 필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부드러움이 상당부분 상쇄되고 콘트라스트와 입자감이 강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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